부모들은 자녀들에 대해 놀랍도록 친화적인 특정성을 가지고 파악하고 있다. 하지만 동시에 각 자녀는 알 수 없는 존재기도 하다. 이 아이는 사실 완전히 다른 세상 속에서 독립적인 삶을 당신의 집 안에서 살고 있는 사람이다. 이 두 가지 사실이 자녀 양육의 스릴과 고통을 낳는다. 자녀존중의 문제다.
어떤 부모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아이는 정말로 도움없이는 못 살 존재가 아닌가? 우리가 아이를 원했을 때, 우리는 여러가지 합당한 이유를 생각해냈다. 하지만 우리가 먼저 생각해본적 있는가? 아이의 입장에서라면 삶이 주어진다는 것이 좋을지, 나쁠지, 어떻게 여길지 생각해본 적 있는가? 하지만 우리가 아이를 낳은 것은, 그 아이를 대신해서, 삶이란 게 괜찮은 것이라는 확신이 있어서 결정한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우리는 그 창조에 대해 반드시 책임감을 가지고 준비를 잘해야 한다.
과거에는 우리는 신이 창조의 모든 책임을 지고 있다고 생각하고 당황한채로 신에게 왜 구태여 문제 많은 우리를 만들었는지 물었다. 신학이 개인적 수준의 문제로 다가온 것이다.
따라서, 태어난다는 것은 번성의 윤리를 다시 생각해보게 만든다. 번성 찬성론자-트럼프의 부통령 후보 지명자 J.D.밴스가 그러하듯이-는 실용적이고, 도덕적이고 존재론적 근거에서 아이를 반드시 낳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반면에 번성 반대론자는 번성이 도덕적으로 잘못된 일일 수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번성이 이 세상에 고통만 더할 뿐이며 지구를 멸망으로 몰아넣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종종 사람들은 아이를 안 갖는 부부에게 왜 그러는지를 캐묻곤 한다. 하지만 오히려 그 반대로 물어야 한다. 왜 굳이 아이를 가지려 하는지 말이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답은 이것이다. ‘혼자 사랑하는 것이 모든 걸 정당화해주진 않기 때문’이다. 아이를 낳는다는 것은 매우 중대하고 무거운 결정이어야 한다. 그것은 나중에 자라나서 우리를 준엄하게 판단하며 무엇이 말도 안되는 짓이었는지를 비판할 아이를 낳는다는 것이다. (작은 성인을 낳는 것이다-필자주) 네덜란드에는 ‘부모되기 서약’이란 게 있다. 안전, 적절한 교육, 폭력 금지, 갈등이 있어도 아이의 유익을 우선시하기 등을 시청 직원 앞에서 서약하는 것이다.
만일 아이가 근원적으로 부모에게 속한 존재가 아니라 분리된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면 어떤 일이 생길까?
이스라엘의 집단농장 키부츠에서는 아이의 생부모가 아이에 대한 독점적 권한을 갖지 않는다. 아이들은 부모집단에 의해 집단적으로 길러진다. 그런 경우도 있기는 하지만, 아이는 역시 누구든 아이와 꾸준히 상호작용할 수 있는 특정인에게 길러지는 것이 좋다. 이런 식으로 생각해보면, 가정은 이전처럼 왕국처럼 운영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아이에게는 자신에게 무엇이 좋은지를 선택할 권한이 있다.
당신이 자녀를 진보든 보수든, 종교적으로든 혹은 아니든, 뭐로 키우려든 간에 당신의 의지를 아이가 거부하기 어려울 정도로 강하게 내비쳐서는 안 된다. 좋은 부모가 되는 것은 아이를 사랑하는 권위있는 부모가 되는 것이지만, 그 권위는 유일무이한 영향력이 아님도 알아야 한다.
칼릴 지브란의 ‘아이들에 대하여’라는 시가 있다. 그중 한 부분이다.
너희의 아이는 너희 아이가 아니다.
아이들은 스스로 자신의 삶을 갈망하는
큰 생명의 아들딸이니
저들은 너희를 거쳐서 왔을 뿐
너희로부터 온 것이 아니다.
또 저들이 너희와 함께 있을 지라도
너희의 소유가 아니니라.
[출처] 칼릴 지브란 / 아이들에 대하여|작성자 영혼의 마법사
간단한 원칙이다.
아이들은 분리된 인격체들이다. 그들에게는 자신의 삶을 이끌고, 만들 권리가 있으며, 삶을 어떻게 살지 선택할 권리가 있다.
한 사람의 생애는 완전히 설명되거나 정당화되거나 소유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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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교육학 개론 시간에, 독일에서 그 학문으로 박사까지 하고 오신 교수님에게 배운 건, 아이에 대한 존경심과 열정이었다. 아이의 질문은 그저 허무맹랑한 게 아니다. 아이가 신에 대하여 질문할 때는, 유치한 대답을 원하는 게 아니다. 삶과 세상에 대한 진지한 고민 속에서 나온 고민이기 때문이다.
아이를 ‘내 자식, 내 아이’로만 보지 않고, 나도 결국은 이 아이의 인생에서 스쳐지나가는 한때의 인연처럼 될 날을 생각해보곤 한다. 어쩌면 우리는 서로 정치, 종교, 경제적인 문제에 있어 관심사가 정반대일 수도 있다. 그래서 서로 그런 주제를 피하느라고 침묵이 길어지고 서로에 대한 무관심이 관계를 지배하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그때에 아이는 아빠였던 나에 대해 어떻게 기억하고 평가를 내릴까 생각하면 모골이 송연하다.
한국에서는 잘못된 생각이 아이도 죽이고 있다. 자신들이 죽고 나면 아이가 홀로 고아로 버려져 고생할 것을 생각해서, 아이와 함께 강요된 자살을 하는 경우다. 아이는, 당신보다 훨씬 나은 환경에서 자라게 될 수도 있다. 오히려 아이에게는 보육원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야 한다. 부모에게는 자녀에게 자살을 강요할 어떤 권리도 없다. 그것은 자신과 남을 함께 죽이는 연쇄살인이다.
아이는 내가 자신을 때때로 귀찮아 하고 버거워 한다는 것까지 전부 눈치채고 있다. 분위기로, 몸으로, 표정으로 다 나타난다. 부모가 케이블카를 타고서 애 앞에서 벌벌 떨어서는 안 되는 것처럼, 아이 앞에서 죽상을 쓰고 앉아있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내 인생이 아무리 고달프고 쓰더라도, 아이가 인생에 대해 그런 관점을 갖도록 만들어서는 안되지 않겠나.
뉴요커 기사들이 주는, 자녀존중에 대한 이런 신선한 반문이 기껍다.
사진-Pixab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