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에 갔을 때, 박경리 선생 기념관에 들러 묘소에도 참배한 적이 있다.
문학 교과서인가에 토지에 나오는 ‘서희’ 이야기가 나왔던 걸 기억한다.
읽어보고 싶다, 읽어야지, 그러나 20권이나 되는 대작을 시작할 시간이 없는 것이 유학이었다.
더구나 남의 나라 남의 땅에서 읽는 우리네 흙의 이야기라니,
시작도 하기 전부터 울음이 복받칠 거 같아 감히 시작을 못하고 있었다.
이외에도 ‘태백산맥’ 같은 대작들이 또 있었던 것이 90년대의 일이었지 싶다.
대학생 누나 형들이며, 문학소년소녀들이 줄창 읽었던 거 같다. 책 빌리러 가면 항상 있던 책들.
요즘은 누가 그리 긴 글을 읽는단가. 그게 슬플 뿐.
선생 기념관에는 선생님이 쓰시던 방 안을 재현한 곳이 있었는데
커다란 교자상 같은 것을 두고 서안 삼아 쓰신 듯한데
그 옆 바닥에는 어지간한 목침 두개는 쌓은 듯한
법전마냥 두터운 ‘국어사전’이 놓여있었다.
이렇게 언어를 벼려 쓰셨구나, 잔잔한 감동이 일었던 기억이 난다.
내가 읽은 첫 대하소설은 최명희 선생의 <혼불> 10권이었다.
그분은 한국에 대한 깊은 사랑을 온갖 문물의 상세한 설명과 함께
전라도의 아름다운 말씨를 살려 쭈욱 기록해내려간 미완성작을 두고 떠나셨다.
거기에도 토지에 나오는 ‘최참판댁’ 같이 소설의 중심이 되는
‘청암부인댁’이 나온다.
두 작품 일견 비슷하게, 명망높은 양반가의 여인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혼불은 전남 남원즈음 땅에서 시작해서 만주에까지 가 끝났으니
토지는 지리산 근처 경상땅에서 시작해 어디가 끝이 날런지 종잡을 수 없다.
아직 박경리 선생의 어떤 글도 접하지 못한 채,
그의 유품과 유작으로 보아
질박한 글솜씨를 미루어 짐작했는데
읽어보니 역시나이며
‘문여기인,’ 글이고 곧 그 사람이란 말이
여지없이 의당하다는 생각이 든다.
몇 개의 숨막히게 진실된 문장들이 있어 여기에 남긴다.
선생은 서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어떠한 역경을 겪더라도
서문, 전자책 8쪽.
생명은 아름다운 것이며
삶만큼 진실한 것은 없다.
비극과 희극, 행과 불행, 죽음과 탄생,
만남과 이별, 아름다운 것과 추악한 것…
그러한 모든 모순을 수용하고 껴안으며 사는 삶은 아름답다…
문학은 그 모순을 극복하려는 의지의 표현 아니겠는가.
그렇다. 문학은 세상에 대한 설명서다. 왜, 어찌하여, 그러저러한 일들이 일어나고야 말았는가를
그저 담담하고 진솔되게 표현하는 것이 문학이다. 그 주제의 대부분은
‘이야깃거리’가 될만한, 들으면 ‘그참 허, 쯧쯧,’하게 되는 이야기들이다.
누가 뭐랄 거도 없이 꼼짝없이 중년이 되고보니
이젠 그러 저러하게 수군대기 좋은 이야기거리들이 들려오고 퍼져나간다.
그러니 문학 읽기에 참 좋은 나이가 아닌가
불타는 여름은 지나고 가을 같은 때가 아닌가 싶다.
모든 걸 돌아보고 반성하고 추억하고 또다시 더 나은 앞을 기약하는..
개맹[개명]이라는 기 별것 아니더마. 한 말로 사람 직이는 연장이 좋더라는 거고
88쪽.
남우 것 마구잡이로 뺏아묵는 짓이 개맹 아니가
박경리 선생은 당신 나이 43세, 1969년, 박정희 독재의 한창기에,
이 소설을 시작해서 1994년, 나이 68세에 25년간에 걸친 집필을 끝냈다. 문민정부가 들어선 연후였다.
그러한 시대의 질곡때문인지 문학에 더욱 깊이 집중하신 듯한데,
그렇다고 해서 그분이 소위 ‘순수’문학만 하셨는가,
그렇지 않다는 것을 그분의 날카로운 역사 인식을 통해 알 수 있다.
작품은 19세기 조선 말기로 시작하기 때문에
우리가 잘 아는 조선 말기-대한제국 간의 혼란상이 군데군데 나온다.
단발령을 내려 나라는 기울어가는데 머리카락 자르고 양복입는 일이
개명인 줄 알던 시대인데
박경리 선생은 신랄하게 ‘개명’놀음의 진실을 파헤쳐낸다.
그것은 일본이 총포, 폭력을 앞세워 ‘너희를 위하여 하노라’한 짓이
바로 ‘개명’이었고 제국들이 전세계에 인두껍 쓰고는 못할 괴이한 짓 한 것을
내리 까내리는 것이 아닌가.
소설가는 그러한 존재다. 방 안에 가만히 있는 것 같으면서도
앉아 천리를 내다보아야하는 존재다. 그렇게 해서 언어를 벼려 ‘진실’을 폭로하는 일.
임의로 죽을 수 없는 게 사람의 목숨이란 말씀이오.
264쪽.
설령 삶이 죽음보다 고생스러울지라도 사람은 살아야 하는 게요.
아마도 인생은 선생에게도 고생스러운 것이었나 보다.
누군들 안 그러랴. 아무리 황금수저를 쥐고 태어났대도 말이다.
거기에 ‘인간의 문제’가 있다. 고통.
혹자들에겐 고통이 더 찌르듯 예민하게 느껴져서
삶을 고만 두고 싶을 것이다. 너무나 피로하고 무의미하고 기가 막혀서.
자신의 사소한 삶을 관두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선생은 말한다.
삶이 죽음보다 고생스러울지라도 살아내야 한다고.
소설의 허구를 통해 진실을 말하고 있다. 살아내야 한다고.
만리장성 구절양장 같은 20권의 이야기를 읽고나면
다양한 사람들의 인생 이야기를 통해
‘나도 살아야지, 나도 끝내 살아내리라,’
심굵은 힘이 나리라 생각하며 기대해 본다.